칼럼

약혼 파기의 요건과 책임, 민법이 정한 해제사유의 의미 2026-08-27

 

약혼 파기의 요건과 책임, 민법이 정한 해제사유의 의미


 

 

1. 약혼의 법적 성질과 강제이행 금지의 원칙

혼인에 이르는 과정에서 분쟁이 생기는 것은 혼인 이후만이 아닙니다. 결혼을 약속하고 준비를 진행하다가 어느 일방이 관계를 깨뜨리는 경우, 흔히 파혼이라 부르는 이 국면에도 법률의 규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대법원은 약혼을 혼인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혼인의 예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약속이자 합의라는 점에서 약혼 역시 하나의 계약으로서의 성질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약이라면 그 이행을 청구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약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민법 제803조는 '약혼은 강제이행을 청구하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이란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하여야 하는 신분행위이므로, 마음이 떠난 사람에게 법의 힘으로 혼인을 강제한다는 것은 혼인 제도의 본질과 양립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여기에서 약혼 분쟁의 구도가 정해집니다. 약혼을 지키라고 청구할 수는 없는 이상, 다툼의 대상은 파기 그 자체를 막는 것이 아니라 파기에 정당한 사유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 책임을 누가 지는지의 문제로 옮겨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약혼 파기의 요건이라는 말은 파기를 위한 허가 요건이 아니라, 책임 없이 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사유가 무엇인지의 문제인 셈입니다.

 

2. 민법 제804조가 정한 약혼해제의 사유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책임 없이 약혼을 해제할 수 있을까요? 민법 제804조는 상대방에게 다음 사유가 있는 경우 약혼을 해제할 수 있다고 하여 여덟 가지를 정하고 있습니다. 약혼 후 자격정지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경우, 약혼 후 다른 사람과 약혼이나 혼인을 한 경우, 약혼 후 다른 사람과 간음한 경우, 약혼 후 1년 이상 생사가 불명한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혼인을 거절하거나 그 시기를 늦추는 경우 등이 제1호부터 제7호까지 열거되어 있고, 제8호는 '그 밖에 중대한 사유가 있는 경우'라는 포괄 조항입니다.

눈여겨보실 것은 이 조문의 구조입니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유를 먼저 열거하고 마지막에 포괄적 사유를 두는 방식은 재판상 이혼사유를 정한 제840조와 같은 층 구조인데, 결국 실제 분쟁에서 다투어지는 것은 대부분 제8호의 중대한 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입니다. 제1호부터 제7호까지의 사유는 그 존재가 확인되면 다툼의 여지가 크지 않은 반면, 성격의 문제나 신뢰의 훼손과 같은 사정들은 결국 제8호의 해석 문제로 수렴하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이 제8호를 적용한 사안을 하나 보겠습니다. 중매로 만나 열흘 남짓의 교제를 거쳐 약혼한 사안에서, 일방이 자신의 학력과 직장의 직종·직급을 사실과 다르게 말한 것이 약혼 후에 밝혀진 사건입니다.

"약혼은 혼인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혼인의 예약이므로 당사자 일방은 자신의 학력, 경력 및 직업과 같은 혼인의사를 결정하는 데 있어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항에 관하여 이를 상대방에게 사실대로 고지할 신의성실의 원칙상의 의무가 있다."

— 대법원 1995. 12. 8. 선고 94므1676 판결

대법원은 이러한 기망으로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깨어져 애정과 신뢰에 바탕을 둔 인격적 결합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면 제8호의 중대한 사유에 해당하고, 따라서 속은 쪽의 약혼 해제는 적법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약혼 단계에서도 서로에 대한 고지의무가 인정되고, 그 위반이 해제의 정당한 사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3. 정당한 해제와 부당한 파기의 구별

이제 책임의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민법 제806조는 약혼을 해제한 때에 당사자 일방은 과실 있는 상대방에 대하여 손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정하면서, 재산상 손해 외에 정신상 고통에 대하여도 배상 책임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조문을 앞의 해제사유와 겹쳐 놓으면 두 가지 경우가 갈라집니다. 상대방에게 제804조의 사유가 있어 약혼을 해제한 경우라면, 해제한 쪽이 오히려 과실 있는 상대방에게 혼인 준비를 위하여 지출한 비용과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런 사유가 없음에도 일방적으로 관계를 깨뜨린 경우라면, 파기한 쪽이 부당파기로 인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파기 자체는 누구도 막을 수 없지만 책임의 소재는 사유의 유무에 따라 정반대가 되는 것이니, 결국 약혼 분쟁의 실질은 언제나 이 구별에 걸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위 판결에는 참고할 대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속은 쪽에도 상대방의 학력이나 직급을 시간을 갖고 확인해 보지 아니한 채 경솔하게 약혼한 잘못이 있지 않느냐는 반론에 대하여, 대법원은 그러한 사정을 중대한 과실이라 할 수 없고 위자료 액수를 산정할 때 참작할 사정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기망에 대한 책임의 소재 자체는 속인 쪽에 있다는 것이 분명히 된 것입니다.

 

4. 약혼 파기와 예물 반환의 관계

약혼이 깨어지면 실무적으로 반드시 따라오는 문제가 예물의 반환입니다. 이에 관하여 대법원은 예물 수수의 법적 성질을 다음과 같이 새기고 있습니다.

"약혼예물의 수수는 약혼의 성립을 증명하고 혼인이 성립한 경우 당사자 내지 양가의 정리를 두텁게 할 목적으로 수수되는 것으로 혼인의 불성립을 해제조건으로 하는 증여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므로…"

— 대법원 1996. 5. 14. 선고 96다5506 판결

다소 어렵게 들리실 수 있으니 풀어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예물을 주고받는 것은 혼인이 성립하지 않으면 되돌린다는 조건이 붙어 있는 증여와 비슷하다는 것이므로, 약혼이 파기되어 혼인에 이르지 못한 경우에는 그 조건이 성취되어 서로 예물을 반환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위 판결은 일단 부부관계가 성립하고 혼인이 상당 기간 지속된 이상 후일 혼인이 해소되더라도 예물의 반환을 구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예물 반환은 어디까지나 혼인에 이르지 못한 파기 국면의 문제인 셈입니다.

결국 약혼 파기를 둘러싼 다툼에서 정리되어야 할 것은 셋입니다. 해제의 사유가 존재하였는지, 그에 따라 손해배상의 책임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 그리고 예물을 포함한 재산관계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지입니다. 어느 것이든 파기에 이른 경위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자료가 판단의 기초가 되는 것이므로, 감정이 격해지기 쉬운 국면일수록 관련 자료를 정리해 두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약혼 파기의 책임 문제로 다툼이 예상되는 상황이시라면, 대응에 앞서 변호사와 상세한 상담을 받아보시기를 권유드립니다.